우리동역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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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명 유래
[정자동(亭子洞)]
이 지역이 조선 중기 이후 왕족인 전주이씨의 세거지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. 조선 제 9대 임금 성종의 아들(12남) 무산군(茂山君)의 제 5자인 태안군(泰安君) 이팽수(李彭壽)[1490~1525]의 묘역과 그 자손들이 터를 잡았다. 태안군의 증손이 되는 이경인(李敬仁)[1575~1642]은 이천부사겸 광주병마진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내놓고 이곳 탄천 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(閑雲野鶴)으로 소일하였다. 그 후 그가 즐기던 '정자가 있는 마을'란 뜻의 '정자리'가 되었다.
이 지역이 조선 중기 이후 왕족인 전주이씨의 세거지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. 조선 제 9대 임금 성종의 아들(12남) 무산군(茂山君)의 제 5자인 태안군(泰安君) 이팽수(李彭壽)[1490~1525]의 묘역과 그 자손들이 터를 잡았다. 태안군의 증손이 되는 이경인(李敬仁)[1575~1642]은 이천부사겸 광주병마진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내놓고 이곳 탄천 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(閑雲野鶴)으로 소일하였다. 그 후 그가 즐기던 '정자가 있는 마을'란 뜻의 '정자리'가 되었다.
동의 유래
정자동(亭子洞)의 이름은 조선중기에 이천부사 겸 광주병마진관 등을 역임한 이경인(李敬仁, 1575~1642)이 '정자'를 짓고 학문에 전념한데서 유래한다. 이경인은 자를 극보(克甫), 호를 정촌(亭村)이라 하였고, 1642년 (인조2)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이 되고 함흥판관, 안산현감, 이천도호부사에 제수되었다. 그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 슬을 내놓고 이곳 탄천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(閑雲野鶴)으로 소일하였다. 그후 그가 즐기던 '정자가 있는 마을'이라 하여 정자리(亭子里)로 부르게 되었고 그의 호 ‘정촌’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. 또는 정자나무가 있어서 정자말, 정자골, 정자동이라 하였다고 한다.
동의 연혁
- 1971.09.13. 광주군에서 성남출장소가 분리.독립하면서 돌마면 정자리에 속함
- 1975.03.17. 성남시 돌마출장소 관할이 되었다.
- 1989.05.01.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
- 1991.09.17.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될 때 분동
- 1993.06.05. 분당동에서 내정동으로 분동
- 1995.03.07. 내정동에서 정자동으로 분동
- 1996.01.05. 정자동에서 신기동(현 정자1동), 불정동(현 정자3동) 분동
- 2001.01.01. 정자2동으로 명칭을 변경